청주 사창동주민센터.
청주 사창동주민센터.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6·12정상회담 때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약속한 동창리 서해 위성발사장이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는 최근 3.8노스의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다.

북한의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은 그동안 미국에 큰 위협을 줘 왔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관련 핵심기술 연구기지로 알려져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의 비핵화에 좋은 전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곳 동창리는 북한의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 위치하고 있다. 철산군은 고려 때 서희(徐熙)가 외교력으로 수복한 강동 6주의 하나로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는 고을’이라해 붙여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의 실제 배경지로 조선 효종 때 철산부사 전동흘(全東屹)이 배좌수의 딸 장화(薔花)와 홍련(紅蓮)이 계모의 흉계에 의해 원통하게 죽은 사건을 소설화해 널리 알려졌다.

동창리는 한자 그대로 동쪽(東)에 창고(倉)가 위치하고 있어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시대 창고는 단순히 곡식 등을 보관하기 위한 시설을 넘어 농민의 몰락과 이탈을 방지하며 농촌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주요한 시설이었다.

그래서인지 남한이나 북한이나 창고가 있던 곳은 여지없이 지명으로 남아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울의 북창동, 남창동, 평창동, 염창동(소금창고), 경기도 하남시의 상사창동(上司倉洞), 하사창동(下司倉洞)이, 평택시 팽성읍 동창리, 전북 진안군 백운면 동창리 등이 그 예다.

북한에도 평안남도 북창군, 회창군 등 창고 관련 지명이 상당수 남아 있다. 그럼 충북은 어떨까. 충북에선 청주시 서원구 사창동(司倉洞)이 대표적인 예다. 이곳 사창동은 조선시대 사창(社倉)이라는 창고가 있어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영조 때 여지도서에 서주내면 사창리(社倉里)가 보이고 있다. 원래 사창제도(社倉)는 의창(義倉), 상평창(常平倉)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창고제도의 하나로 일종의 곡물대여기관이었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되던 빈민구제책으로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했다. 사창의 이익은 약 20% 정도로 의창의 곡식을 배당받아 정부의 감독아래 향촌 자치로 운영됐다.

1448년 세종은 사창제 실시를 주장하던 이보흠(李甫欽)을 직접 대구로 보내어 설치해서 시험하도록 명했고, 1451년 문종 때에 이르러 사창제가 제도화돼 경상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창이 설치돼 계속 확장돼 갔다.

하지만 갈수록 곡물의 대여가 고르지 못해 제 역할을 못했고 급기야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론이 대두됐다. 이 때 관권 주도의 사창제도는 일단 폐지됐으나 사족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이뤄졌다.

상호부조라는 측면에서 사창의 실시는 향약에 부분적으로 흡수돼 대체되거나 각종 계의 활발한 조직과 운영으로 성격이 변질되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 사창을 한자로 ‘司倉(사창)’으로 쓰고 있으나 이 사창은 세종 때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대읍에 설치했던 창고를 말한다.

현재 여러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司倉(사창)’이란 지명은 ‘社倉(사창)’이란 한자로 표기하는 게 맞다. 조선시대의 사창 제도는 국가가 국민에게 베푸는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였다.

그 정신은 백성을 사랑하고 천하의 태평을 기원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남북한에 이러한 창고에 의한 지명이 여럿 남아 있는 것은 곳간을 풀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천하의 태평을 기원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신경직 LH공사 현도사업단장
신경직 LH공사 현도사업단장

▷신경직(사진)은 청주 문의에서 태어나 충북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법학 석·박사를 졸업했다. 현재 문화재보존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어릴 때부터 역사와 여행을 좋아했고 이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에 입사,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전국을 여행하면서 여러 지역의 문화와 지명에 관심을 갖고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명속의 역사산책(디자인 신화)’이란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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