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입구 수정초등학교 인근에선 V자로 크게 상처 난 소나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흉물스럽습니다. 이 상처는 일제 강점기에 생겼습니다.
속리산 입구 수정초등학교 인근에선 V자로 크게 상처 난 소나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흉물스럽습니다. 이 상처는 일제 강점기에 생겼습니다.
충북대 안 탈마당에 있는 상수리 나무에도 각각 같은 높이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배고프던 시절, 허기를 때워야 했던 우리네 사람들이 도토리를 채취하고자 돌로, 혹은 나무망치 등으로 내리쳐 생긴 낙인 같은 흉터입니다.
충북대 안 탈마당에 있는 상수리 나무에도 각각 같은 높이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배고프던 시절, 허기를 때워야 했던 우리네 사람들이 도토리를 채취하고자 돌로, 혹은 나무망치 등으로 내리쳐 생긴 낙인 같은 흉터입니다.
청주의 주성초교 내에는 100년도 더 돼 보이는 느릅나무가 정문입구에 서 있습니다. 100년이 넘은 학교에 100년이 넘은 나무가 서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지요.
청주의 주성초교 내에는 100년도 더 돼 보이는 느릅나무가 정문입구에 서 있습니다. 100년이 넘은 학교에 100년이 넘은 나무가 서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지요.

속리산 입구 수정초등학교 인근에선 V자로 크게 상처 난 소나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너무도 깊어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흉물스럽습니다. 이 상처는 일제 강점기에 생겼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군의 해상봉쇄작전으로 휘발유와 항공유의 조달이 어려워진 일제는 군사용 송탄유를 만들기 위해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합니다. 송탄유는 소나무에 상처를 내 나오는 송진을 받아 끓여 만듭니다.

예로부터 약재와 등불의 원료가 되었으나 일제 말기에 한반도 전역에서 송진을 강제로 채취하게 된 것입니다. 일제의 무분별한 송진채취로 인해 우리나라 구석구석 소나무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최근에는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이 송진채취 피해목의 분포와 피해현황을 조사하여 피해 소나무 전국 분포도를 제작했고 상처가 남은 소나무 서식지를 산림문화자산으로 등록추진하기로 했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충남 안면도, 경남 해인사 홍유동 계곡, 제천 박달재가 송진 채취 피해목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늦은바 있습니다만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송진은 소나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곤충과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물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송진이 주요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활용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송진채취를 했으나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전 국민을 힘들게 했던 송진채취의 흔적은 흉터처럼 남아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이 아프면 나무도 아픕니다. 고통스럽던 기억까지도 사람과 나무가 함께 기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역사적으로도 늘 굶주림의 극단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청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소론의 영수였고 영의정까지 지낸바 있는 청주목사 남구만(南九萬)은 ‘청주 상당산성 기우제문(淸州上黨山城祈雨祭文)’(현종 12년 1671년)에서 당시의 참상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헌에는 “지난 가을과 올 봄에 뿌린 씨앗이 말라 죽어 길과 도랑에는 굶어죽은 사체가 늘어가고 자식까지 생매장할 정도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같은 참상을 목도한 청주 목사 남구만은 ‘진휼을 청’하고 청주목의 기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 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의 청주사람들이 남구만이 떠난 후 정성을 모아 그를 기리는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도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생사당은 말 그대로 관찰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는 표시로 살아 있을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사당을 일컫습니다.

남구만의 영향력은 조선 후기까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조선후기 정조시대 구휼에 앞장서며 사창법을 제시한 이단하라는 인물은 굶어 죽게 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기존의 구황법을 최대한 응용해 새로운 방식의 구황법을 제시합니다.

그는 동헌 뜰에 절구를 설치해 솔잎을 빻은 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는 남구만에게서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이렇듯 소나무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입니다. 잎을 비롯해 솔잎, 솔방울, 송진, 소나무 껍질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소나무는 흉년과 가뭄으로 구휼이 필요하던 시절에는 구황식물로서의 소임을 다 해 왔습니다. 사람이 굶으면 나무가 고스란히 자신을 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조선시대 농서에는 곡물류를 제외한 구황식품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도토리, 두 번째가 소나무, 세 번째가 느릅나무였습니다. 잎과 뿌리, 열매, 줄기, 꽃 등 적당한 방법으로 조리해 섭취하도록 했습니다.

도토리가 자라는 상수리나무의 상처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충북대 안 탈마당에 있는 상수리 나무에도 각각 같은 높이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배고프던 시절, 허기를 때워야 했던 우리네 사람들이 도토리를 채취하고자 돌로, 혹은 나무망치 등으로 내리쳐 생긴 낙인 같은 흉터입니다.

이런 상수리나무들은 늘 수액이 흘러나왔고, 이 상처에는 곤충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나마 치료를 받았거나 스스로 상처를 치유한 나무들은 살아남았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나무들은 베어지곤 했습니다.

도토리는 구황식물로는 최고입니다. 지금도 도토리묵은 맛있는 요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봄에 가뭄이 들면 들녘 벼들의 결실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풍매화인 상수리나무들은 매마른 바람 따라 엄청난 번식을 하게 되지요.

흉년이 들면 도토리는 오히려 결실양이 늘어 굶주린 사람들의 구황을 담당했던 겁니다. 역으로 비가 많이 와 풍년이 들면 상수리나무들의 수정은 줄어들어 도토리 수확량이 줄어듭니다. 자연의 이치가 사람들의 이해와는 차이가 있기에 유익함을 분담할 수 있었던 겁니다.

느릅나무는 삼국사기에도 구황작물로 기록돼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온달전에 고구려 평강왕(平岡王)때 공주가 궁궐을 나서 맹인노모를 만나 아들의 소재를 물어보니 “우리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속에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미 당시부터 느릅나무를 구황작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릅나무껍질을 한방에서는 유백피(楡白皮)라고 하는데 오래 복용하게 될 경우 눈이 침침해지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일각에선 맹인노모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렇듯 느릅나무는 오랜 시간 우리네 주요 구황작물로 활용되어 왔으며 일제 수탈기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청주의 주성초교 내에는 100년도 더 돼 보이는 느릅나무가 정문입구에 서 있습니다. 100년이 넘은 학교에 100년이 넘은 나무가 서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지요. 그래서 그 나무와 얽힌 이야기들이 있을까 인터넷을 뒤졌는데도 자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 느릅나무를 보면서 궁핍하여 초근목피로 살아가야 하던 시절에도 학내의 나무는 건들지 않았음을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궁색하고 배고파도 자식이 공부하는 학교 느릅나무에 껍질을 벗겨갈 마음은 없었던 것 아닐까요.

세상이 아프고 내 삶이 곤궁해도 미래를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지 않았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마음을 지금도 당당하게 서있는 느릅나무를 보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네 역사 속 어디를 둘러봐도 세상이 아프면 나무도 함께 아파했던 기억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광희 충북도의원
이광희 숲해설가·전 충북도의원

▷이광희 숲해설가·전 충북도의원은 성남고와 충북대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충북대 대학원에서 산림학과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한국청년연합회(KYC)공동대표와 민화협 청년위원장, 산남두꺼비마을신문 편집장, 충북숲해설가협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이근식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민주당 충북도당 대변인, 제 9대, 10대 재선 충북도의원을 지내고 지난해 6.13지방선거 더불어민주당 청주시장예비후보로 활약했다. 그의 저서로 '나는 지방의원이다', '이광희가 들려주는 우리 동네 풀꽃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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