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별이 내려앉는다. 서양에서 지평선이 사라지고 우리가 별들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느끼는 것을 ‘천상의 도약’이라고 한다. 지평선 가까운 데까지 별들이 보이고 은하수는 지금처럼 희미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윤곽을 갖고 빛났다.  사진은 좌구산 천문대 북천하늘[제공=좌구산천문대]
하늘에서 별이 내려앉는다. 서양에서 지평선이 사라지고 우리가 별들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느끼는 것을 ‘천상의 도약’이라고 한다. 지평선 가까운 데까지 별들이 보이고 은하수는 지금처럼 희미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윤곽을 갖고 빛났다. 사진은 좌구산 천문대 북천하늘[제공=좌구산천문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날 장에 갔던 아버지가 귀여운 송아지를 사 오셨다.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송아지를 길러 보라는 것이었다.

대가족을 이뤄 살고 있는 친구들은 형이나 삼촌이 있어 소를 기르거나 텃밭을 일구는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큰아들인데다 아버지 나이 마흔다섯에 태어나 삼촌도 없었기 때문에 적게는 몇 살 많게는 열 살 더 먹은 형들이 하는 일들을 해야 했다.

내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송아지를 끌어다 뒷산에 매어두는 것으로 시작됐다. 내가 학교에 간 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두 번 옮겨 매었다.

송아지를 기르면서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가끔은 친구들이 나를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송아지를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했다.

하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소를 기르다 보면 자연을 깊이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쇠꼴을 벨 때 어떤 풀은 소가 좋아하고 어떤 풀은 먹지 않는지 가리는 것이 중요했다.

방동사니 같은 풀은 절대 안 먹었고 바랭이는 좋아했지만 많이 먹으면 설사를 해 다른 풀과 섞어 줘야 했다. 신기하세도 우리 고장에선 ‘삘기’라고 불렀던 띠를 섞어주면 설사를 하지 않았다.

소를 맬 때 절대 비탈에 매면 안 된다는 금기도 있었다. 네 다리를 가진데다 몸이 무거운 소가 비탈에서 잘못 넘어지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와 관련된 미시적인 생태 관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주는 경이로움이었다.

산 능선에서 날마다 보는 것이 저녁노을이었다. 우리 마을 서쪽에 있는 산이 매방산이다. 봄에는 매방산 남쪽에서 지던 해가 여름이면 매방산 북쪽에서 졌다.

해가 산 뒤로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남기는 노을은 날마다 그 모습이 달랐다. 그날 끼어 있는 구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색채와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름을 보고 그날 노을이 어떤 모습일까 추측해보기도 했다.

해가 지면 송아지를 데리고 우리 집 바로 뒤에 있는 돼지무덤으로 내려왔다. 그 무덤은 다른 무덤보다 몇 배 컸는데 어렸을 때는 진짜 돼지가 묻혀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무덤에 묻힌 사람이 욕심이 많은 지주란 것을 알게 됐다.

지주의 무덤은 다른 무덤보다 높고 넓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놀이터였다. 돼지무덤은 내가 봄에서 가을까지는 아침에 소를 매어놓는 곳이고 겨울이 되면 눈썰매를 타는 곳이었다.

그 무덤 상석에 앉아 마을 앞으로 펼쳐지는 광경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초가지붕들이 겹쳐 있고 그 앞에 냇물과 논, 저 멀리서 멧부리들이 흘러가는 모습은 우리 마을에 대한 어릴 적 기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땅거미’란 말이 있다. 해가 넘어간 뒤 땅이 검어지는 것을 어른들은 ‘땅거미’가 진다고 했다. 마치 검은 구름이 퍼져나가듯 동쪽 낮은 땅으로부터 생겨난 어둠은 서쪽하늘 노을을 없애가면서 우리 마을을 둘러싼 세상을 깊고 두텁게 덮어 버렸다.

몇십 분 동안이지만 그 변화 과정을 느끼고 새기는 과정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즐거움이었다. 모든 것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햇빛이 사라지고 우리 마을을 둘러싼 세계가 서서히 어두워지면 모든 물체의 구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산의 윤곽마저 어둠이 잠기면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낮의 밝음은 세상을 탐색하는 힘을 주지만 어둠은 나만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시간이 된다.

눈이 세상의 윤곽과 빛깔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내 몸 전체가 하나의 감각 기관이 된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그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새들이 날개치는 소리, 숲 바닥에서 바삭거리는 소리….

이윽고 하늘에서 별이 내려앉는다. 서양에서 지평선이 사라지고 우리가 별들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느끼는 것을 ‘천상의 도약’이라고 한다.

나는 하늘로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별들이 내려와 그 속에 내가 잠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름에 저녁밥을 먹고 평상에 누우면 다시 한 번 별들의 잔치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우리 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렸을 때 어두운 밤하늘을 항상 볼 수 있었다.

여름 하늘에는 은하수가 두 갈래로 굽이치는 모습이 내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가을이 되면 하늘 한 가운데 네모반듯한 별자리가 보였다. 28수 가운데 실수와 벽수 사이, 서양 별자리로는 페가수스 별자리이다. 그 네모꼴 안에 여러 개 별들이 있었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그 별들을 세는 놀이를 가을마다 몇 년에 걸쳐 했지만 끝내 다 세어보지 못했다. 누님들과 함께 별 헤는 노래도 불렀다.

우리 마을 동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고 죽암 휴게소가 생기면서 빛 공해가 심각해졌다. 별과 달은 떠오를 때 더 크고 웅장하다. 하지만 동쪽 하늘이 항상 밝으니 그 장관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남쪽에 있는 신탄진에도 공단이 생기면서 북극성도 희미해졌다. 그래서 어렸을 적 별에 관한 기억은 가장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제법 많은 밤하늘로, 그러고는 드문드문 별들이 보이는 밤하늘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과정이었다.


문재현 마을배움길연구소장
문재현 마을배움길연구소장

▷문재현(사진)은 청주에서 태어나 마을배움길연구소장으로 ‘왕따 예방 프로그램인 평화샘 프로젝트 책임연구원’도 맡고 있다. 새로운 학문,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교육과정에 대해 탐색 중이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아기 어르는 소리와 자장가를 복원하고 공동육아 등 유치원 교사들과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의 토대를 만들었다. 별자리 인류의 이야기 주머니, 우리 강산 가슴에 담고, 원흥이 방죽 두꺼비, 학교 폭력 멈춰, 아이들을 살리는 동네, 마을에 배움의 길이 있다 등 다수의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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