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흥수아이가 구석기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관심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 흥수아이가 구석기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관심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만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5살쯤 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국화꽃을 바치고 이후에도 진달래꽃으로 슬픔을 달랬던 흔적으로 추정됩니다. 인류역사상 누군가의 주검에 의례용 꽃을 바친 첫 번째 사용 흔적입니다. 4만년 전에도 국화와 진달래가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지요. 꽃가루 중에는 소나무의 꽃가루가 함께였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소나무류가 우점종이 아니었을까요?
4만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5살쯤 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국화꽃을 바치고 이후에도 진달래꽃으로 슬픔을 달랬던 흔적으로 추정됩니다. 인류역사상 누군가의 주검에 의례용 꽃을 바친 첫 번째 사용 흔적입니다. 4만년 전에도 국화와 진달래가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지요. 꽃가루 중에는 소나무의 꽃가루가 함께였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소나무류가 우점종이 아니었을까요?

1982년 충북 청원군 문의면 산자락중 하나인 두루봉에 위치한 동굴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의 사람뼈 2개체분이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이 동굴은 2굴, 9굴, 새굴, 처녀굴 등 여러갈래의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흔적들과 함께 발견됐습니다.

이 뼈들은 인근의 큰용굴과 작은 용굴, 소로리 유적 등과 함께 청주권역의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존재와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단양의 수양개유적 등과 더불어 한반도 중부권의 선사유적들 속에서 구석기시대인의 발자취를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산개발로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가끔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만일 두루봉동굴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다면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는 구석기시대를 재현하는 생활사박물관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제가 살고 있는 곳 주변이어서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때나 지금의 숲은 다른지, 두루봉동굴은 사라졌지만 다행이도 당시 유적들은 충북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보기에도 출토된 사람뼈는 세계 역사속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한 형태였습니다.

당연히 학계는 환호 했고 당시 사람뼈 출토사실을 제보한 두루봉에서 석회암을 채광하던 문의광산 김흥수씨의 이름을 붙여 ‘흥수아이’라 명명하게 됐다는 설명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 흥수아이는 판판한 석회암 돌을 아래위로 놓고 바로펴묻기한 상태였습니다. 또 흥수아이와 함께 가슴높이쯤에 당시의 식기와 국화과의 꽃가루가 집중 검출됐고, 진달래꽃가루도 함께 검출되었습니다.

4만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5살쯤 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국화꽃을 바치고 이후에도 진달래꽃으로 슬픔을 달랬던 흔적으로 추정됩니다. 인류역사상 누군가의 주검에 의례용 꽃을 바친 첫 번째 사용 흔적입니다. 4만년 전에도 국화와 진달래가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지요. 꽃가루 중에는 소나무의 꽃가루가 함께였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소나무류가 우점종이 아니었을까요?

최근 흥수아이가 구석기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관심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는 흥수아이의 위아래 어금니 대부분에서 충치가 보인다면서 갈아 만든 음식이나 곡식을 먹는 신석기시대에는 충치가 흔하지만, (곡물 농사를 짓기 전인)구석기시대에는 거의 보기 힘든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선주 명예교수는 두루봉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비교하며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이미 후기구석기 시대에 충치 치료를 했다는 증거도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학문적 문제제기와 즉각적 의견 대립이 이뤄지면서 흥수아이는 다시 관심과 조명을 받는 중입니다. 그럴수록 당시에는 어떤 동물과 어떤 나무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지 더 궁금해졌습니다.

얼마 전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란 책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약 7만년 전 현인류의 조상인 사피엔스는 동시대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호모에렉투스 종들을 지구에서 몰아내고 지금까지 유일한 종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몸집이 더 크고 사냥도 잘하던 다른 종족들을 멸절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언어로 대표되는 인지혁명 때문이었습니다.

이전과 비교해서 새롭게 얻게 된 의사소통방식은 이방인들과 유연하게 협력하는 사고방식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이를 활용해 공통의 신화를 믿는 대규모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후 사피엔스의 두 번째 혁명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식물종의 삶을 조작하고 이어 몇몇 동물들을 사육하게 되면서 이 과정에서 인간이 식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완벽하게 길들이는 과정으로 진화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살아남은 사피엔스가 바로 우리지역에 살았던 흥수아이를 묻고 의식을 거행하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여러 갈래의 굴속에서 집단생활을 이뤘으며 막집터와 무덤을 만들고 불을 이용해 사냥한 고기를 익혀 먹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한 주먹도끼, 찍개, 긁개, 밀개, 사냥돌 등을 일상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충북대 박물관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옛코끼리, 쌍코뿔이, 동굴곰, 큰원숭이, 하이에나, 사슴, 쥐 등 46종의 동물화석이 함께 발굴 되었습니다. 청주 문의면에 커다란 코끼리와 쌍코뿔소 등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두루봉 처녀굴에서는 큰 꽃사슴 뿔과 함께 완전한 개체의 동굴곰이 출토되었는데 ‘큰 꽃사슴 뿔’을 중앙에 놓고 동굴곰 머리뼈를 남쪽에, 아래턱은 1m 떨어진 엉덩뼈 위에 X자로 얹어 놓았습니다. 위팔뼈, 허벅지뼈, 정강이뼈 등 긴 뼈들을 모두 동서방향으로 일정하게 놓인 상태로 출토됐다고 합니다.

이는 곰뼈와 사슴뼈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서 당시에 이곳에서 의식행위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청주지역에 살았던 구석기시대 사람의 인류학적 특징과 생활, 동물사냥과 도살행위, 예술과 신앙, 매장행위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기왕 공부한 김에 조금 더 자세한 자료에서 비슷한 시기로 보이는 단양의 구낭굴에서 정리된 동물상 분포를 살펴보았습니다. 고기를 먹는 식육류가 23.8%로 가장 많고, 사슴을 비롯한 주로 풀을 먹는 짝굽짐승이 19.1%, 그리고 쥐들이 15%를 차지합니다. 전체의 38%를 차지하는 쥐들을 포함한 작은 짐승들이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당시의 자연환경이 숲이 발달하고 작은 크기의 나무(관목)들이 넓게 퍼져 있었음으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먹이 습성별 분포가 상당히 고르게 나타나는데 곤충을 주로 먹는 동물, 열매를 주로 먹는 짐승들과 함께 잡식성 짐승이 꾸준하게 분포했다는 점은 숲과 나무가 넓게 퍼져 있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출토된 짐승의 뛰기, 이동을 살펴보면 넓은 들이 필요한 뛰어다니는 짐승은 아주 적고 숲지성 짐승들이 크게 우세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단양은 깊은 계곡의 좁은 골이 많았고 청주는 너른 들에 커다란 짐승들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흥수아이가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는 어떤 나무들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단양 구낭굴에서 나온 숯 시료에는 11속 13수종으로 침엽수인 소나무 가문비나무와 활엽수로 느릅나무과(느릅나무속, 팽나무속, 시무나무속)과가 있었습니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이야기’ 속에 나온 그 느릅나무입니다.

또 뽕나무과와 장미나무과(벚나무속, 장미나무속, 개살구나무)가 있습니다. 사과, 복숭아, 자두, 살구 등 많은 유실수들이 장미나무과입니다. 고로쇠나무류(단풍나무, 단풍나무속)와 상수리나무류도 발견됐습니다. 온난한 기후에서 자라는 온대 수종이 우점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식별된 수종으로 보면 현생 식생에서 흔히 발견되는 참나무류나 소나무류를 비롯한 침엽수가 비교적 적게 나타나고 오리나무류와 느릅나무속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오리나무류는 북반구의 냉·온대 북부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느릅나무속은 북반구 온대지역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저습지에서 자라는 오리나무가 대다수를 차지해 소로리 지층이 습지환경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온대기후로 이어지던 시기였던 겁니다. 현시대 중부지역의 오리나무류는 온난화로 인해 많이 쇠퇴하고 있는 중입니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유적에선 토탄층을 분석 할 수 있어서 100만년 전 후한 때부터의 생물상을 알 수 있습니다. 둥근 빨대 같은 관으로 깊게 찔러 넣어 토탄층을 분석 한 결과 신생대의 제4기 동안(250만년 전~현재)에 크게 4차례의 빙기와 3차례의 간빙기가 있었던 것으로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빙기가 끝나가는 1만2000년 직후의 토탄층 상부에서 출토된 목재를 통해 확인 된 오리나무와 느릅나무 등 두 수종은 한반도의 온대중부와 온대북부에 걸쳐 분포하는 것으로 토탄층형성 당시 기후는 지금과 비슷하거나 다소 습윤한 것으로 보여 빙하기가 완전히 물러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충북대박물관, 단양군 출판 수양개와 그 이웃들]

이런 가운데 소로리 볍씨가 발견됩니다. 1만2000년경이면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시작되는 시기와 거의 같습니다. 그쪽은 밀과 보리농사를 지었다면 이곳 한반도에서는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었다고 봐야 되는 겁니다. 당시 한반도의 중부지역에 광범위하게 살아가던 호모사피엔스들은 집단생활과 사냥, 농사 그리고 제례의식을 거행하던 우리네 조상들이었습니다.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4만년 전 자식의 죽음에 바쳐졌던 슬픈 꽃이었음을 생각 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광희 충북도의원
이광희 숲해설가·전 충북도의원

▷이광희 숲해설가·전 충북도의원은 성남고와 충북대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충북대 대학원에서 산림학과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한국청년연합회(KYC)공동대표와 민화협 청년위원장, 산남두꺼비마을신문 편집장, 충북숲해설가협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이근식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대변인, 제 9대, 10대 재선 충북도의원을 지내고 지난해 6.13지방선거 민주당 청주시장예비후보로 활약했다. 최근 민주당 중앙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저서로 '나는 지방의원이다', '이광희가 들려주는 우리 동네 풀꽃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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