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유화부인은 아들이 왕이 된 뒤 그 신성화 과정에서 집단 모두가 숭배하는 땅과 곡식의 여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유화부인은 달의 신이었네”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왕실의 기획 아래 전 고구려로 퍼졌을 것이다.[문재현의 별자리 이야기 중에서] 지난해 좌구산 천문대에서 관측된 슈퍼블루 불그스름한 달이 뜬 모습(2018 Super Blue Reddish Lunar Eclipse)이 이채롭다.[좌구산 천문대] 유화부인은 달의 신에 비유됐다.[충북메이커스]
인간 유화부인은 아들이 왕이 된 뒤 그 신성화 과정에서 집단 모두가 숭배하는 땅과 곡식의 여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유화부인은 달의 신이었네”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왕실의 기획 아래 전 고구려로 퍼졌을 것이다.[문재현의 별자리 이야기 중에서] 지난해 좌구산 천문대에서 관측된 슈퍼블루 불그스름한 달이 뜬 모습(2018 Super Blue Reddish Lunar Eclipse)이 이채롭다.[좌구산 천문대] 유화부인은 달의 신에 비유됐다.[충북메이커스]

[충북메이커스-문재현의 별자리이야기-7.]국어국문학자들은 이야기와 갈래(장르)를 세 가지로 나눈다. 민담, 전설, 신화이다.

민담은 “옛날 예적에”로 시작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더라”로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아주 잘하셔서 그때마다 나는 다른 세계로 여행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전설은 “신라 적에”, “고려 적에”로 시작해서 지금도 “어디에 ○○가 남았다”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내가 사는 마을은 옛날 문의현이다. 문의현은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대치했던 곳이기 때문에 성도 많고 전설도 많다.

우리 마을에서 해 뜨는 방향에 있는 고남산에는 김유신 전설이 있고, 북쪽 독안산 밑과 서쪽의 소문산에는 연개소문에 관한 전설이 남아 있다. 노고봉에는 장군이 던진 칼이 바위가 됐다는 칼바위가 있고 우리 마을에서 옆 마을인 모약골로 가는 길목에는 장군 발자국도 남아 있다. 이러한 전설은 내가 우리 마을과 그 주변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게 부추겼다.

우리 마을 어른들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도 신라, 고구려, 백제를 다 알고 있었다. 우리 고장에는 삼국시대에는 성 쌓기 전설과 장군 이야기, 고려시대에는 절과 스님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서원과 선비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는 공동체의 장소와 관련된 전설을 들으면서 역사적 기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 또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다. 제주도에선 본풀이라고 한다. 본풀이는 굿을 할 때 신의 내력을 풀이하는 이야기이다. 건국 신화는 동맹이나 영고와 같은 나라굿에서 노래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한 의례의 목적은 나라를 세운 시조가 신성한 존재, 곧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백성들에게 주입하는 것이었다. 왕들은 최고신과 혈연관계를 통해서 국가의 신성함과 지속성을 보장받으려 했다.

따라서 옛날에 신화는 일반인들이 언급하면 불경에 해당하는 범죄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해줬던 단순 신화나 주몽 신화는 재미있는 이야기, 민담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유리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의 돌 위 소나무 밑에 있는 칼을 찾기 위해서 산골짜기를 헤매는 대목에 꽂혔다. 그래서 뒷산과 고장에 있는 여러 산을 올라갈 때마다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고 혹시 칼 같은 것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 때문에 내가 살고 있던 고장의 구석구석을 다 가보았다. 주몽이 수수께끼를 통해서 유리의 지리적 사고와 슬기를 기르려고 했다면 그를 위대한 교육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신화를 그 집단의 대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로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습속, 신앙까지 알 수 있는 문화연구의 자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배 이데올로기란 측면보다는 민중의 생활사란 측면에서 접근한다.

단군 신화를 볼 때도 그랬지만 주몽 신화를 볼 때도 수수께끼의 기능과 결혼제도, 기우제와 같은 민간신앙을 먼저 살펴본다. ‘삼국지위서동이전’을 보니 고구려의 혼인제도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인 집에서 살다가 아이를 다 기르면 분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는 성리학이 생활풍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조선 후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혼인제도였다. 이러한 제도에선 여성의 지위가 좀 더 높고 그 풍습도 자유로웠다. 중국 역사책 ‘북사’를 보면 “풍속에 음란함을 즐겨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습속에 유녀(遊女)가 많은데 남편으로 일정한 사람이 없으며 밤이면 남녀가 무리 지어 재미있게 노는데 귀천의 구분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유화부인과 유리의 어머니 예씨 부인은 유녀였을 것이다. 유리가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예씨 부인은 “네게는 특별히 정해진 아버지가 없구나”라고 대답한다.

아는 이 대목이 예씨 부인이 유녀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화부인도 특별히 정해진 곳 없이 다녔으니 유녀로 생활하다가 금와왕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본디 건국 신화는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만들 수도 없다. 그 집단 모두가 공유하는 신앙을 바탕으로 할 때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을 당시의 최고신인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땅과 공식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신성한 존재로 높여야 했다. 인간 유화부인은 아들이 왕이 된 뒤 그 신성화 과정에서 집단 모두가 숭배하는 땅과 곡식의 여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유화부인은 달의 신이었네”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왕실의 기획 아래 전 고구려로 퍼졌을 것이다.

 


문재현 마을배움길연구소장
문재현 마을배움길연구소장

▷문재현(사진)은 청주에서 태어나 마을배움길연구소장으로 ‘왕따 예방 프로그램인 평화샘 프로젝트 책임연구원’도 맡고 있다. 새로운 학문,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교육과정에 대해 탐색 중이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아기 어르는 소리와 자장가를 복원하고 공동육아 등 유치원 교사들과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정의 토대를 만들었다. 별자리 인류의 이야기 주머니, 우리 강산 가슴에 담고, 원흥이 방죽 두꺼비, 학교 폭력 멈춰, 아이들을 살리는 동네, 마을에 배움의 길이 있다 등 다수의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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