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이 꿈에 계시를 받고 판뒤 왕건의 군사와 군마에 물을 먹여 후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설화가 내려오는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의 충북 사적 기념물 제84호 방정(方井)이 잘 보존돼 내려오고 있다.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이 꿈에 계시를 받고 판뒤 왕건의 군사와 군마에 물을 먹여 후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설화가 내려오는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의 충북 사적 기념물 제84호 방정(方井)이 잘 보존돼 내려오고 있다.

 

청주 동남부 지역이 최대의 신흥주거단지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에서 시행하는 청주동남지구는 1만6000세대, 인근의 청주방서지구도시개발조합이 시행하는 방서지구는 3800여세대 등 모두 2만여세대를 공급할 계획으로 있다.

이들 개발사업의 중심지에 방서동(方西洞)이 위치하고 있고, 자연부락 마을인 ‘대머리’가 있다. 청주 사람들은 행정명인 방서동 보다는 대머리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대머리 마을을 두고 마을 지형이 민둥산과 같이 대머리 지형이거나 아니면 대머리인 사람들이 많아서 유래된 지명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지명 속에는 지금부터 약 1200년 전 궁예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당시 이 지역의 호족이었던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과의 운명적인 만남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10세기 고려시대 초. 고려의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을 치기 위해 이곳 청주를 거쳐 가게 된다.

당시 가뭄으로 왕건의 군사와 군마 등이 모두 지쳐 어려움을 겪을 때 이곳의 호족인 한란(韓蘭)이 왕건의 군사를 반기며 군사와 군마에 물과 식량을 공급, 결국 후백제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한창 가뭄 때 왕건의 수많은 군사와 군마에 식수를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방서동(方西洞)에 위치하고 있는 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우물은 한란(韓蘭)이 꿈에서 계시를 받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우물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우물이 바로 충북기념물 제84호 방정(方井)이다.

왕건의 군사는 이 우물 덕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원동력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 왕건은 한란에게 큰 벼슬 내렸고 이때부터 이곳은 큰 인물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대인(大人)이 거주하는 마을인 ‘대멀’ 또는 ‘대말’로 불리다가 차츰 불리기 쉬운말로 언어가 순화되면서 대마리, 대머리로 바뀌었다는 게 정설이다. 멀과 말은 고어에서 마을이란 뜻으로 쓰였다.

왕건의 군사와 군마에게 물을 먹였다는 우물 방정은 지금 비록 일반에 쓰이지 않지만 충북의 사적 기념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그 옛날 고려의 왕건과 청주한씨 시조 한란의 역사적 만남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그 형태가 사각형이므로 한자 그대로 네모난(方) 우물(井)이라 하여 방정리(方井里)라고 하였고, 이 방정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이 방서동(方西洞), 동쪽에 위치한 곳이 지금은 운동동으로 흡수된 방동동(方東洞)이었다.

한 때 농경지가 대부분이었던 이곳에 최근 상당구청이 이전하고 뉴스테이 공급촉진지구로 지정된 청주지북지구가 추가로 개발될 전망이다.

이처럼 청주동남지구는 대머리의 또 다른 어원 ‘큰 마을’이란 말처럼 최근들어 청주 최대 주거 및 상업의 신흥단지로 개발되고 있다.

그야말로 큰 인물들이 거주하게 될 ‘대 마을(大村)’로 거듭 변해갈 것으로 기대된다.


신경직 LH공사 현도사업단장
신경직 LH공사 현도사업단장

신경직(사진)은 청주 문의에서 태어나 충북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법학 석·박사를 이수했다. 어릴 때부터 역사와 여행을 좋아했고 이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에 입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전국을 여행하면서 여러 지역의 문화와 지명에 관심을 갖고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명속의 역사산책(디자인 신화)'이란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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