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의 마을유래비에서 사사로움이 없는 충직한 충심이 무엇인지를 전해주고 있다.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의 마을유래비에서 사사로움이 없는 충직한 충심이 무엇인지를 전해주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갈수록 사람 간의 신의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엿볼 수 있는 마을유래비가 있어 소개한다.

지난 6.13지방선거에서도 정치적 철학과 신념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해 유·불리를 따져 가볍게 움직인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은 바 있다.

새롭게 출범한 민선7기(민선5기) 단체장들에게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하양 허씨들의 충성스런 간언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성공한 정부를 위한 든든한 지방정부’에 힘을 실어 준 국민들의 뜻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청주에서 충주방향으로 34번 국도를 달리다 우측 515호 지방도를 갈아타고 괴산 소수면으로 향하다 보면 우리에겐 생소한 고마리(叩馬里)란 마을이 나온다.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叩馬里)의 유래를 살펴보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자 풀이로 ‘말(馬)을 잡아당긴다(叩)’란 의미의 ‘고마리’의 어원은 마을유래비에 잘 소개가 돼 있다.

조선 단종 원년(1453년), 수양대군 이방원(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이극관 등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결국은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당시 형조판서를 지낸 허후(許詡)는 계유정난이 잘못되었음을 간언하다 결국은 세조의 노여움을 사 게제도로 귀양 가던 도중 이곳 괴산 고마리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른다.

이후 허후의 아들 허조(許慥)는 단종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돼 자결을 하게 된다. 세조는 허조의 시신에 형을 집행했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인 허연령(許延齡), 허구령(許九齡)을 모두 참하였다.

그러나 셋째아들인 허정(許精)은 당시 태어난 지 15일 밖에 되지 않아 15세 되는 해에 형을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어느덧 허정이 15세에 이르자 형을 집행하고자 하였으나 이때는 세조가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던 차라 그를 죽이지 않고 충청도 괴산으로 귀양 보내도록 했다.그리하여 이곳에 허정의 후예인 하양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정조는 허후(許詡)가 본래 청렴결백해 충성스러운 간언을 하여 미움을 받았을 뿐 그 정신은 중국 주(周)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에 버금간다고 하여 허후의 충정을 높이 칭송했다.

이에 충신의 충언을 뜻하는 고마이간(叩馬而諫)이라 하여 이곳이 고마리(叩馬里)라 하였다고 한다. 현지에선 ‘고말귀’라고 부르고 있다.

붙들 고(叩), 말 마(馬), 말 이을 이(而), 간언할 간(諫)이란 고미이간의 뜻을 직역하면 ‘말을 붙들고 임금께 간언하다’는 뜻이다.

주(周)나라의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때 신하가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고 말고삐를 붙잡고 불가함을 간하다 결국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사자성어이다.

현재는 이들 허후 자손들의 충정을 기리는 ‘충효각’이 이곳에 세워져 있고 마을 뒷산은 백이, 숙제가 충절을 지킨 뜻을 이어받아 수양산이라 부르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아픈 역사의 한 조각을 알려주고 있다.

신의가 부정되고 있는 각박한 현실의 사회에서 고마리의 유래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전해주고 있다.


신경직 LH공사 현도사업단장
신경직 LH공사 현도사업단장

▷신경직(사진)은 청주 문의에서 태어나 충북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법학 석·박사를 졸업했다. 현재 문화재보존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어릴 때부터 역사와 여행을 좋아했고 이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에 입사,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전국을 여행하면서 여러 지역의 문화와 지명에 관심을 갖고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명속의 역사산책(디자인 신화)’이란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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